목차

왕국~제국 시기

카엘루스 왕

카엘룸 왕국의 시초이자 건국자. 카엘루스와 레무스 쌍둥이의 전설이 건국 이야기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성국 사람들은 흔히 카엘루스와 레무스가 반인반신이라고 믿었으나, 루치교가 자리잡은 지금은 단순 동화로 취급된다.

율리우스 황제

세 명의 원수가 서로를 견제하며 통치하던 형태를 한 명의 황제를 두는 것으로 개편하며, 카엘룸 왕국이 원수정을 지나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황제. 약 50년경 카엘루마의 영토 형태를 현재와 비슷하게 완성하였으며, 이어 동서를 잇는 ‘카엘루마의 길’을 짓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황제로부터 150년까지 이어지는 시기를 ‘카엘루마의 평화’라고 이른다.

성국 시기

성황 디디우스

카엘루마의 길이 계속 정비되기는 했으나, ‘카엘루마의 평화’가 끝나고 200년경에는 영토의 서쪽과 동쪽 끝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져 크고 작은 분쟁과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253년, 막 재위에 오른 디디우스 황제는 루치교를 국교로서 공인하고, 스스로를 ‘성황’으로 선언함으로써 혼란을 극복하고자 했다. ‘성황’이라는 호칭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또한 디디우스 성황은 대대적인 제도 개혁을 시행했으며, 디디우스 성황의 재위 말기인 300년경, 콘클라베 등 성황제국 체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디디우스 성황은 장수하였으며, 303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성황 트리페나

약 7인의 성황이 재위에 올랐다 물러난 후, 추기경 트리페나가 동서 콘클라베의 만장일치로 성황에 선출되었다. 트리페나 성황은 오래전 디디우스 성황의 죽음으로 종료되었던 개혁을 이어받아, 451년, 성국의 각 지역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에 역할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자 밀라나를 수도로, 톨로사콘스탄티노파를 각각 서방/동방의 대주교령으로 지정하였다. 이때 14세기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는 성황제국의 속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성황 마가르타

전대 성황. 동부의 이사브리아 공작가 태생으로 태어났으며, 일찍이 성직에 귀의해 평생 독실한 삶을 살았다. 마가르타의 치세는 무난했다고 평가받으며, 특별히 신학 연구에 성황 스스로도 관심을 보여 수도원과 성전의 신학자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위 말기 ‘이변plugin-autotooltip__small plugin-autotooltip_big이변

약 15년 전부터 천천히 확산되어, 현재는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해를 이른다. 성국과 제국에서는 주로 “이변”, “이적”, 왕국에서는 “변동”으로 불린다.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이변”으로 분류되는 재해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유사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전례 없는 규모의 폭풍, 전염병, 혜성, 가뭄, 일식, 지진, 기근 등 다양한 유형의 재해가 각지에서 목격되고 있으며, 3년 전에 이르러서야 재해가 일어난 곳에 투명한 광물 형태의 부산물이 남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보고되기 시작하여,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현상을 관찰하며 대응책을 마련하기 전 국경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소모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막 즉위한 파디샤 바예지데와 평화조약을 맺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선언함으로써, ‘평화의 성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382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성황 암브로시오

1382년 선출된 성황으로, 현재 성국의 최고 지도자이다. 고아로, 어릴 적부터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7세 경 세르빌리 백작을 후견인으로 둔 채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앙심이 독실하고 유순한 성품으로, 신학교 재학 중에도 수도원과 성전을 오가며 신학 연구에 매진했다. 신학교 졸업과 함께 전대 성황의 대자가 되었다.

조용한 성정으로 인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재해 혹은 ‘이변’이 점차 두드러지던 시기 마가르타 성황이 사망하고, 성황 후보자로 내세울 추기경이 마땅치 않던 상황에, 전대 성황의 대자로서 그간의 신실했던 행적이 재평가되었다. 이에 역대 가장 젊은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황으로 즉위했다.

이변이 점차 심해지는 상황에 큰 우려를 표하며, ‘대공의회’를 소집하였다.